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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입이 없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 - 잃어버린 몸 (커버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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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입이 없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 - 잃어버린 몸

아작

할란 엘리슨 지음, 신해경.이수현 옮김

2017-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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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저자소개
목차
<b>“신이시여, 할란 엘리슨이네.”
중단편만으로 휴고상, 에드거상, 네뷸러상 등 각종 문학상을
60여 차례나 수상한 살아 있는 전설이자 미친 천재!

“여기, 진짜가 나타났다.” 중단편만으로 휴고상, 에드거상, 네뷸러상, 브람스토커상, 세계판타지문학상 등 각종 문학상을 60여 차례나 수상한 SF, 판타지 소설계의 대부이자 살아 있는 전설, 미친 천재 할란 엘리슨의 국내 첫 작품집.

1,700여 편에 이르는 전방위적인 작품과 더불어, “작가는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며 청소년 범죄에 관해 쓰기 위해 가짜 신분으로 브루클린 갱단에 들어갔고, 롤링 스톤즈 등과 함께 여행한 뒤 로큰롤을 묘사하기도 했으며, 흑인 참정권 운동을 위해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주도한 셀마-몽고메리 행진에 동참하기도 한 행동하는 자유주의자.

영화 <터미네이터>를 비롯해 자기 아이디어를 베꼈다고 생각한 영화 제작사들을 상대로 지독한 저작권 소송을 벌이고, 검열 반대 운동에 앞장서 국제 작가 연맹으로부터 ‘실버 펜’까지 수상한 ‘천재’, ‘괴물’, 그리고 ‘전설’ 그 자체인 할란 엘리슨의 대표 수상작 모음 전집.

“할란 엘리슨은 자기 키가 159센티미터라고 하지만,
재능과 열정과 용기 면에서는 2미터가 넘는 거인이다.”
- 아이작 아시모프

<b>작품 소개

용암과 메스를 갖춘 독설가, 할란 엘리슨

할란 엘리슨의 휘황찬란한 수상 이력에도 불구하고 국내에 작품집이 소개되지 않는 이유는 그의 성질머리 때문에 저작권 계약이 지나치게 까다로운 탓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진위는 알 수 없으나 그런 뜬소문에 신빙성을 더할 만큼 할란 엘리슨은 미국 장르소설가들 사이에서 매우 악명이 높다. 그는 40년 동안 SF, 호러, 판타지 장르에서 유력한 수상 후보로 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서도, 사석에서는 종종 “저 빌어먹을 할란”, “신이시여, 할란 엘리슨이네”, “너 그 말 할란 엘리슨이 못 듣게 해”라는 말이 따라다닌 인물이다. 그가 술집에서 당구를 치다가 프랭크 시나트라와 주먹을 주고받았다든가, 월트 디즈니에 출근한 첫날에 부적절한 농담으로 해고됐다든가, 자기 글을 폄하한 교수를 때려서 입학한 지 18개월 만에 대학에서 퇴출당했다든가(엘리슨은 이후 자신의 작품이 발표될 때마다 그 교수에게 복사본을 한 부씩 보냈다고도 한다), 영화 <터미네이터>를 비롯해 자기 아이디어를 베꼈다고 보이는 영화 제작사들을 상대로 지독한 저작권 소송을 벌였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하지만 할란 엘리슨의 악명이 드높은 이유는 무엇보다 그가 탁월한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는 1955년 데뷔한 이래 작품을 쏟아내며 1,700여 편의 글을 썼고, 114권의 책을 쓰거나 편집했고, 12편의 시나리오를 냈다. 그의 이력은 다양한 장르를 망라하는 중·단편과 함께 TV쇼 각본, 시나리오, 코믹북 스토리, 에세이, 미디어 비평을 두루 포함한다. 엘리슨의 휴고상, 네뷸러상, 에드거상, 브램스토커상, 로커스상 등의 수상 기록은 20세기를 통틀어 최고봉에 속한다. 젊은 엘리슨에게 명성을 가져다준 <“회개하라, 할리퀸!” 째깍맨이 말했다>는 오 헨리의 <동방 박사의 선물>이나 셜리 잭슨의 <제비뽑기>와 함께 영어에서 가장 많이 인쇄된 이야기 10위에 들어가고, 그가 각본을 쓴 <스타 트렉> ‘영원의 경계에 선 도시(The City on the Edge of Forever)’ 에피소드는 시리즈 79편 중 최고로 꼽힌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엘리슨을 두고 “그는 자기 키가 159센티미터라고 하지만, 재능과 열정과 용기 면에서는 2미터가 넘는 거인”이라고 평한 바 있다. 이 책은 국내 최초로 소개되는 엘리슨의 대표 걸작선으로, 2014년 출간된 《화산의 꼭대기(Top of the Volcano): 할란 엘리슨 수상집》을 주제에 따라 세 권으로 나누어 옮긴 것이다. 작품의 해설은 작가 소개에 맞추어 연대기별로 정리했다.

<b>1. 미국 뉴웨이브의 전성기를 이끌다

할란 엘리슨은 로저 젤라즈니, 새뮤얼 딜레이니와 더불어 가장 스타일리시한 뉴웨이브 작가로 평가된다. 뉴웨이브는 60, 70년대에 주류를 이룬 SF의 하위 사조로, 과학기술적인 측면보다 인간 내면의 심층 세계를 중시하고 전위적인 실험으로 문학성을 추구하는 점이 특징이다. 이 중에서도 엘리슨은 용암처럼 강렬하고 감각적인 표현으로 미국 뉴웨이브의 전성기를 견인했다. 엘리슨의 초기 대표작 <“회개하라, 할리퀸!” 째깍맨이 말했다>(1965)는 문장을 완성하기보다 단발적으로 끝맺으며 독자를 다음으로 이끄는데, 이는 시각 효과와 서스펜스를 극적으로 활용한 A. E. 밴 보트식 작법론의 모범례라 할 만하다. 하지만 엘리슨의 현란한 서술과 심리 묘사는 뉴웨이브의 시초이자 “불꽃놀이” 같은 문체라고 일컬어졌던 앨프리드 베스터의 영향을 강하게 드러낸다. 특히 <사이 영역>(1969)은 어지럽게 붕괴하는 활자 배치와 이미지로 시각적인 충격을 시도하면서, 베스터의 《파괴된 사나이》나 《타이거! 타이거!》에서와 같은 문학적 실험을 엘리슨이 어떻게 계승했는지 시사하는 작품이다. 실제로 엘리슨은 앨프리드 베스터의 《컴퓨터 커넥션》의 추천사를 통해 죽은 작가에게 바치는 경탄과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분노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친 짐승>(1968)은 지극히 암시적인 글이다. 엘리슨은 여기서 오래된 상징체계를 차용해 SF의 방식으로 신화를 구현한다. ‘머리 일곱 달린 용’은 물론 성경에 등장하는 짐승이고 ‘열자마자 내용물이 흩어지는 상자’는 판도라의 상자다. 엘리슨은 신화가 그렇듯 ‘배출’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변천’이 무엇인지 전혀 설명하지 않고 독자가 알아서 이해할 영역으로 남겨둔다. 그러나 신화와 달리 작중의 주역은 기술과 인간이며, 우주의 이쪽과 저쪽을 인과적으로 연결해 아득하고 아연한 암시를 남기는 모습은 더없이 SF답다. 이는 엄밀한 과학적 서술에 치중하는 하드 SF가 각광받기 전에 “소프트”한 뉴웨이브가 어떻게 명성을 떨쳤는지를 증명한다.
국내에도 일찍이 소개된 적 있는 <소년과 개>(1969)는 디스토피아와 서부 활극을 합친 비뚜름한 중편으로, 예상을 뒤집는 결말은 인간의 증오와 사랑이 주된 테마라는 엘리슨의 작품 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렇듯 인간이라는 내우주(內宇宙)에 치중하는 경향은 <랑게르한스섬 표류기: 북위 38˚ 54´ 서경 77˚ 00´ 13″에서>(1974)에 이르면 한층 추상적이고 상징적으로 발전한다. 이 단편은 문자 그대로 주인공 속으로 들어가며, 영화 <울프맨>의 비극을 괴물과의 싸움이 아니라 깨달음을 향한 내면세계 여행으로 마무리한다.

<b>2. 메스와 소실점

한편 기괴한 이야기를 그릴 때 엘리슨은 문학의 메스를 들고 인간의 터부를 헤집곤 한다. 한 줌의 희망도 없는 닫힌 세계를 헤매는 사람들, 스멀스멀 고조되는 불안감,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의 악행과 광기, 일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메슥거림은 엘리슨의 단편에서 흔히 그려지는 모습이다. 그리고 이런 재난은 무엇보다 인간 자신의 결함에 기인한다는 특징을 지닌다. 콘돔을 쓰는 대신 여자에게 낙태를 시키는 남자가 버려진 아이들의 지옥에 떨어지는 <크로아토안>(1975)은 그야말로 자업자득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이렇듯 엘리슨의 작품에서 인간은 악의에 찬 신들의 장기말이고 놀잇감으로 희생당하면서도 직접 산제물을 바치며 재앙을 초래하는 광신도라는 이중적 면모를 보인다.
전쟁, 죽음, 파멸은 현실 세계의 것이지만 엘리슨이 그리는 그림에는 이를 흠향하는 사악한 신이 전체 구도를 지배하는 소실점처럼 자리한다. 수록작 중에는 <나는 입이 없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1967)가 대표적이다. 인류가 만들어낸 컴퓨터 AM이 복수심을 충족하기 위해 등장인물들을 살아 있는 채로 영원히 고통받게 만든다는 이 이야기는 두고두고 회자되며 만화, 게임, 라디오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1995년 작 게임에 수록된 AM의 목소리는 엘리슨이 직접 담당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매 맞는 개가 낑낑대는 소리>(1973)는 1968년에 실제로 있었던 유명한 살인사건을 모델로 삼은 작품이다. 키티 제노비스라는 여성이 칼을 든 남성에게 강간 살해된 사건이었다. 작중에서처럼 살인자는 제노비스가 비명을 지르자 놀라 도망쳤지만 아무도 현장에 나타나지 않자 다시 돌아와 마저 그녀를 죽였다. 신문은 그녀의 비명을 들은 주변 아파트 거주민 중 누구도 신고하지 않았다며 노골적인 비난을 토했다(실제로는 신고가 있었다고 한다). 심리학자들은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방관자 효과’를 제안했다. 엘리슨은 이 사건을 ‘신의 부재’와 ‘사악한 신의 탄생’으로 형상화한다. 현대 인간이 지닌 냉혹함, 둔감함, 자기 중심성이 결국 인간들 자신을 끔찍한 새 신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마침 당시는 아이라 레빈의 소설 《로즈메리의 아기》(나중에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졌다)에 나타나 있듯 우리 이웃의 평범한 주민들이 사탄숭배 집단이라는 의혹이 떠돌던 때이기도 하다.
베트남전 후유증을 드러낸 <바실리스크>(1972)는 전쟁과 민주화에 얽힌 70년대 미국의 부조리를 담고 있다. 베트남전 참전 경험과 들불처럼 일어난 반전 평화운동, 민주주의 운동은 미국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전쟁 후유증에 시달리는 퇴역군인들의 PTSD 연구 및 피해자 보상 문제도 함께 부상했다. 미국이 1964년 베트남전에 참전해 1973년 철수할 때까지 많은 작가가 군대에 징집되어 이러한 부조리와 마주했으며, 육군에서 대체복무로 종사한 엘리슨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바실리스크> 말미에 나오는 “민중에게 권력을(Power to the People)”은 유명한 반전 및 민주주의 운동 구호이자, 한창 평화운동가로 활동하던 존 레논이 1971년 발표한 노래 제목이다. 전쟁의 신 마르스가 이를 음미하는 대목은 인간의 나약함과 잔인함을 파헤치기를 서슴지 않았던 독설가 엘리슨다운 결정타라 하겠다.
이렇게 ‘사악한 신’과 인간의 관계를 밝히는 작업은 <죽음새>(1973)를 통해 기독교를 재해석하는 데 이른다. ‘불타는 덤불’로 나타나는 ‘미친 자’는 AM처럼 질투하고 분노하고 벌하는 하나님이다. 구약성경의 소재는 이후로도 종종 나타나는데, <아누비스와의 대화>(1995)는 인간의 죄와 분노한 신이라는 테마를 변주한 단편이다.

<b>3. 앙팡 테리블, 약간 녹은

50년에 걸쳐 풍부한 작품군을 보유한 엘리슨은 SF 작가보다는 그저 작가라고 불리길 선호한다고 말한 바 있다(“SF 작가라고 불러봐, 너희 집에 나타나 네 애완동물을 테이블에 못 박아버릴 테니”). 밴 보트와 합작한 <인간 오퍼레이터>(1970)는 SF 팬이 기대할 법한 SF지만, 다른 스타일의 이야기도 만만찮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셰익스피어 소네트를 그대로 단편으로 이어간 <괘종소리 세기>(1978), 휴고상, 로커스상, 네뷸러상을 모두 수상하며 격찬을 받은 <제프티는 다섯 살>(1977), 죽음을 더없이 아름답고 경건하게 받아들이는 <잃어버린 시간을 지키는 기사>(1985), 상실의 아픔을 ‘타나토스의 입’으로 만든 <꿈수면의 기능>(1988) 네 편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시간의 비가역성을 애도한다.
특히 <콜럼버스를 뭍에 데려다준 남자>(1991)는 장르소설을 거의 뽑지 않는 <미국 베스트 단편소설집>에 수록되는 쾌거를 누렸다. 작중에 언급되는 셜리 잭슨의 단편은 이 중편의 전신이나 다름없으니 아직 읽지 못한 독자라면 작품의 주인공 레벤디스의 말대로 “성경을 무시하고 집으로 돌아가 셜리 잭슨의 단편 <땅콩과 보내는 평범한 하루>나 다시 읽는” 시도를 해봐도 좋겠다. 하루는 선행, 하루는 악행을 행하는 레벤디스의 모습을 훨씬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중견 작가가 되면서 인간의 증오와 사랑을 다루는 엘리슨의 관점은 장르에 매이지 않는 만큼이나 복합적이고 다면적으로 발전한다. 끔찍한 악동이라 부르기에 부족하지 않다는 점은 여전하지만, 그의 후기 작품은 나이를 먹으면서 부드러워졌다는 평을 듣는다. 아라비안나이트를 현대에 재현한 <지니는 여자를 쫓지 않아>(1982)는 이전 작품과 같은 작가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유쾌하고 행복한 우화다. 남편의 열등감을 숨김없이 지적하는 점이 여전히 심술궂긴 하지만 말이다.
<허깨비>(1988)의 화자인 비징치는 예의 ‘사악한 신’들과 다름없는 가공할 악인이지만, 인류를 지옥도에 빠뜨리는 대신 인류 스스로 바닥에서 벗어날 기회를 준다. 비징치가 두루마리에서 뽑아낸 이야기 조각들은 파멸과 선택을 앞둔 ‘잠 카레트’, 즉 여분의 시간을 포착하고 있다. 장면 하나하나는 흔들 때마다 모습이 변하는 만화경처럼 다채로우면서 무의미하다. 그러나 이 안에는 본질을 관통하는 희미한 기회가 있다. 그 희미한 기회야말로 자신의 세계에서 납치당해 “영원한 고통에 사로잡힌 채 브라운 씨네 거실에 남겨진” 금속 군인을 어디에도 없는 억양으로 말하는 남자로 이어주는 미싱링크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보면 후기작 <쪼그만 사람이라니, 정말 재미있군요>(2009)의 두 가지 결말은 매우 흥미롭다. 엘리슨이 인간에게 제시하는 길은 둘 다 냉혹하기 그지없지만, 우리한테는 끝이 정해지기 전에 숙고할 시간이 주어진다. 절망과 통곡의 도돌이표만 남았던 이전 작품들에 비해서는 훨씬 풍성한 가능성이 생긴 셈이다.

<b>4. 고통과 즐거움을 균형 있게

할란 엘리슨은 책을 기획하고 작품을 발굴하는 데에도 뛰어난 역량을 보였다. 그의 특별 휴고상 둘은 편집자로서 받은 것이다. 《위험한 비전(Dangerous Visions)》(1967), 《다시, 위험한 비전(Again, Dangerous Visions)》(1972)은 할란 엘리슨의 이름 아래 뉴웨이브의 걸작을 모은 앤솔로지다. 《메데아: 할란의 세계(Medea: Harlan’s world)》(1985)는 공동으로 허구의 세계를 창작한다는 ‘공유 세계’라는 발상을 초창기에 시도한 프로젝트로, 할란 엘리슨 외에도 폴 앤더슨, 할 클레멘트, 토머스 M. 디쉬, 프랭크 허버트, 래리 니븐, 프레데릭 폴, 로버트 실버버그, 시어도어 스터전, 케이트 윌헬름, 잭 윌리엄슨이 참여했다. 이는 ‘공유 세계’ 작품 중에서도 성공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잡지 중심이던 당시 SF 시장에서 앤솔로지는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지만, 엘리슨의 《위험한 비전》과 《다시, 위험한 비전》은 뉴웨이브의 매력을 한눈에 보여주며 인상적인 위치를 점했다. 두 권의 작가 목록에는 폴 앤더슨, 레이 브래드버리, 새뮤얼 딜레이니, 필립 K. 딕, 필립 호세 파머, 딘 쿤츠, 어슐러 K. 르귄, 프리츠 라이버, 조애나 러스, 데이먼 나이트, 래리 니븐, 로버트 실버버그, 시어도어 스터전,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커트 보네거트, 케이트 윌헬름, 진 울프, 로저 젤라즈니 등 쟁쟁한 이름이 늘어서 있다. 수록 작가 상당수가 당시에는 신인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탁월한 안목이 아닐 수 없다.
세 번째 앤솔로지 《마지막 위험한 비전(The Last Dangerous Visions)》은 앞의 두 권과는 다른 이유로 특별한 책이 되었다. 조지 R. R. 마틴의 말을 빌리면 “그 책이야말로 같은 분야의 모든 경쟁자를 제치고 SF 역사에 길이 남을 작품집”이다. 발매 지연이라는 분야에서 전설적인 게임이라 할 만한 타이틀 ‘듀크 뉴켐 포에버’를 압도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엘리슨은 이를 1973년에 출간하기로 했고, 책이 곧 나온다고 거듭 장담했고, 1979년에는 수록작 목록을 갱신했으나 결국 출간하지 못했다. 엘리슨에게 원고를 보낸 작가는 약 150명에 이르며 다수가 원고를 살리지 못한 채 사망했다. 엘리슨의 거듭된 호언장담으로 고통받은 작가 중 하나인 크리스토퍼 프리스트는 급기야 《마지막 위험한 비전》의 미출간 사태를 철저히 규탄하는 <마지막 허황된 비전(The Last Deadloss Visions)>을 썼다. 그리고 이를 책으로 확장한 《영원의 경계에 선 책(The Book on the Edge of Forever)》으로 휴고상 논픽션 부문 후보에까지 올랐다.
엘리슨에게 이를 가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보니 농담 반 진담 반의 단체 ‘엘리슨의 적들(EoE, Enemies of Ellison)’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가입비를 낸 회원들은 배지와 뉴스레터를 받을 수 있었다. 이 단체는 ‘적’이라는 단어가 적당하지 않다는 이유로 나중에 ‘엘리슨의 희생자들(Victims of Ellison)’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편, 만일 엘리슨의 친구이고자 하면 이에 대항하는 단체 ‘엘리슨의 친구들(FoE, Friends of Ellison)’에 지지를 보낼 수도 있었다. 우리의 마음 따뜻한 이웃 엘리슨에게 감동했던 사연을 보내면 배지와 뉴스레터를 받는 식이었다. 인크레더블 헐크, 아쿠아맨 등의 코믹스를 만든 피터 데이비드가 시작한 이 단체는 ‘적들’보다 10배의 편지를 받았다.
엘리슨이 비록 까다로운 기준과 무자비한 평가로 많은 이들에게 고통을 선사했더라도, 좋은 글은 솔직하게 칭찬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는 후배 작가 양성에도 결코 무관심하지 않았다. 엘리슨이 미국 극작가 협회에서 주최하는 오픈 도어 프로그램 강사로 있을 때 가난한 작가 지망생이었던 옥타비아 버틀러를 지도한 일은 그의 평생의 자랑거리였다. 인종 분리 정책의 잔재가 남아 있던 시기임에도 엘리슨은 흑인 여성인 버틀러가 작가가 될 수 있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했으며, 그녀는 최초이자 가장 유명한 흑인 여성 SF 작가가 되었다.
“작가는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답게 엘리슨은 현장에 뛰어드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청소년 범죄에 관해 쓰기 위해 가짜 신분으로 브루클린 갱단에 들어갔고, 롤링 스톤즈 등과 함께 여행한 뒤 로큰롤을 묘사했다. 그에게 작가로서 활동하는 일과 사회 활동은 별개가 아니었다. 1978년 성별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성평등 헌법 수정안(ERA, Equal Rights Amendment)을 지지하며 벌였던 독특한 시위가 그 예다. 엘리슨이 애리조나 피닉스에서 열리는 월드컨에 주빈으로 초대받았을 때인데, 당시 애리조나 주의회는 ERA를 비준하지 않으며 반대 측에 선 상태였다. 엘리슨은 이에 항의하는 뜻으로 애리조나에서는 단 한 푼도 쓰지 않겠다고 공표했다. 그는 컨벤션에서 제공하는 호텔을 거부하고 모든 생필품을 실은 자신의 RV에 머무르며 체류 기간 내내 정말로 한 푼도 쓰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페미니스트냐 하면, 2006년 그랜드마스터 칭호를 받으면서는 진행자인 코니 윌리스에게 짜증을 내며 가슴에 손을 댄 사건도 있으니 평가하기가 쉬운 노릇은 아니다. 엘리슨은 자주 사람들이 이전 시대의 역사를 모르고 바보가 되어 간다고 분노했고, 속어, 외설, 신조어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며 미디어 비평을 쏟아냈다. 그의 비평은 《유리 젖꼭지(The Glass Teat)》, 《다른 유리 젖꼭지(The Other Glass Teat)》로 묶여 휴고상 논픽션 후보 부문에 올랐다. 그는 자유주의자이고, 인권단체를 지지하고, 평생 검열 반대 활동을 했다. 국제 작가 연맹(PEN international)은 예술의 자유에 공헌한 엘리슨의 노력을 기리는 의미로 그에게 실버 펜을 수여했다.
할란 엘리슨에게 감탄하기는 쉽지만 그를 좋아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엘리슨의 글을 좋아하기는 매우 쉽다. 그는 나폴레옹보다 작고 히틀러보다는 더 작은, 어릴 때부터 혼자 힘으로 생계를 꾸렸던, 아직도 수동 타자기로 글을 쓰는, 자기 이름이 상표로 등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워싱턴 포스트는 엘리슨에게 “살아 있는 가장 위대한 미국 단편 작가 중 하나”,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20세기의 루이스 캐롤”이라는 별명을 달아주었다. 할란 엘리슨 전기 영화 <날카로운 이빨의 꿈들(Dreams with Sharp Teeth)>(2008)은 그를 이렇게 칭한다. 천재, 괴물, 전설이라고.

- 심완선, SF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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